2019년 4월 14일 ‘15주차 일상정리’

이번 주의 평가는 최악에 가깝다. ‘공차’를 엄청나게 마셔댄 덕에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다음 날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악순환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지속되었다. 이번 주말까지 생체리듬과 습관들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구글 코드잼 Round 1A가 있었다. 오픈 컬리지의 Weekly 오프라인 모임은 참가자 수 미달로 취소되었다. 봄이라 그런지 몸이 피곤하고 졸리다.

카페인 중독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쯤이다. 그때야 공부를 할 때도 아니었지만, 캔커피의 달콤한 맛이 좋아 음료수처럼 매일 커피를 마셨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정말 많은 커피를 마셨다. 그때는 커피를 한 상자를 사다놓고, 2시간에 한 번씩 약처럼 커피를 마셔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습관이었던 것 같다. 이미 카페인에 중독된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참 잘 잤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딱히 커피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 1학년 때 ‘바리스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유행을 시작으로 길거리에 엄청나게 많은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커피에 대한 교양서적들도 유행하기 시작했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배우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커피를 어떻게 즐기는지는 그 사람의 교양과 미각의 수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 때도 커피는 여전히 좋은 음료수였다. 바리스타처럼 짠맛, 쓴맛, 신맛, 탄맛들을 느끼고 품종을 구별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정말 좋아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나 책을 읽을 때, 공부를 할 때 등등 커피는 모든 순간에 잘 어울리는 멋있는 음료수였다.

경찰은 정말 커피를 좋아하는 조직이었다. 지금은 윗분들의 취향이 ‘차’로 바뀌었지만 현장에서는 아직도 커피를 많이 마신다. 그 땐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인사를 나누듯이 서로 인스턴트 커피를 권했다. 가끔 누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농도를 맞추지 못하면 화를 냈다. 실습을 하러가면 선배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다녔는데, 그 때마다 커피를 권해서 어느 날은 하루 실습을 마칠 때까지 7잔 정도의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아무리 커피를 좋아해도 그 정도는 버거운 수준이다. 경찰서 어디를 가더라도 인스턴트 커피는 항상 구비되어 있는 품목이다. 일 하나 끝내고 담배랑 같이 한잔, 졸릴 때 한잔, 아침에 한 잔 등등 누구랑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마셔댔던 것 같다. 담배와 같이 휴식을 상징한다고 하면 맞겠다. 여름철에는 커피를 탄 후에 얼음을 몇 개 띄우면 그만큼 맛있는게 없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이 더욱 많아졌다. 냉장고에서 꺼내먹을 수도 있고, 커피 머신에서 직접 내려먹을 수도 있고, 인스턴트 커피도 있고, 사내 카페에서 주문할 수도 있다.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좋은 구실도 있으니 물 대신 커피를 마셨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다가 건강검진 후 아예 커피를 끊어버리게 되었다. 딱히 금단증상도 없고 괜찮았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공차’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공차에 카페인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정확히는 나만 몰랐던 것 같다. 그것도 모르고 자기전에 2잔씩이나 마시는 덕분에 나는 새벽에 전혀 잠을 잘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유가 카페인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보고나서야 나는 공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알게된 사실은 대부분의 차는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 심지어 ‘페퍼민트’차에도 카페인이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그냥 생수나 열심히 마셔야겠다. 물을 하루에 2L 마셔도 딱히 건강에는 좋지 않고 신장이 고생한다고 한다.

존재의 이유

가끔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렇게 방대한 우주의 엄청나게 긴 시간속에서, 나는 그저 아주 짧게 존재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은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이끌어내고,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을 사라지게 만든다. 지금 살아숨쉬는 모든 사람들이 기껏해야 200년 안에는 모두 숨을 거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와 언젠가는 이별해야한다. 어떤 기록을 남기더라도, 1억년이 지나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사라진다. 먼 시간이 흘러 우리의 세계가 지구라는 한정된 행성에서 우주로 넓혀진다면, 지금의 세계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그 때에도 여전히 중요한 일로 간주될까.

이런 허무주의는 우리가 서로 다른 규모의 것들을 비교하기 때문에 발생된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치로 삼는 것들은 현재 이 시점에서만 유효한 것들이다. 내가 준비하는 미래가 1억년 후에는 어떤 의미도 없겠지만, 몇 년 후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모두 늙고 죽어 없어질 사람들이지만, 지금 내 옆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어떤 스님의 강연처럼 그 물음에는 답이 없다. 적어도 지금의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번뇌해서 얻는 곳이 오직 고통뿐이라면, 그냥 살아있는 지금을 즐기는게 가장 좋지 않을까. 어떤 삶을 살든지 그 종착역이 죽음이라면, 오로지 과정만이 우리 삶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 그 종착역으로 가는 과정이 행복으로 가득하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을테니까.

구글 코드잼

구글 코드잼은 매년 구글에서 개최하는 프로그래밍 대회로, ACM-ICPC 스타일의 알고리즘 문제를 해결하는 대회다. 비슷한 규모의 대회로는 Topcoder라는 사이트에서 개최하는 TCO가 있다. 최근 대부분의 IT 기업에서 알고리즘 코딩테스트를 실시하면서, 이 대회도 점점 더 유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개발자들 사이에서 이런 알고리즘 테스팅이 실제 개발에서 중요한지 여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나는 개발경력은 짧고, 알고리즘 대회를 취미로 쭉 해온 나는 뭐가 정답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개발 능력이라는 것이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어려운 코딩 테스트가 확실히 판별해낼 수 있는 점은 있다. 그건 바로 지원자의 ‘문제 해결 능력’이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조건들을 관찰하고 필요한 알고리즘을 응용하는 능력이다. 알고리즘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기 때문에, 지원자가 어느 정도까지 어려운 수준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방법이 미래에도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한국에서 코딩 테스트를 전문적으로 대비해주는 학원이 생긴걸보면, 이 테스트도 토익처럼 유형화되고 학습될 수 있는 시험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포트폴리오보다 경제적이고 객관적인 필터링 장치가 맞긴하다.

Weekly

Weekly는 ‘오픈 컬리지’라는 곳에서 내가 운영하는 소모임이다. 멤버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구글 드라이브 폴더에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한 주를 공유한다. 오프라인 모임은 2주에 한 번 열리는데, 강제성은 다. 이것도 가능하다면 Hangout으로 대체하고 싶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이면 적당해 보인다.

지금 회원은 20명 정도가 모여있고,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여기에 모으고 싶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일상은 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전환점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일상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일주일을 기록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엑셀 시트를 통해 계획표처럼 하루를 기록하고, 어떤 사람은 손글씨로 일기를 쓴다.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를 짧은 글과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만든 카드들을 제출했다. 사람이 많아지면 좋은 점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정말 소중한 기회들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내 태도는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다. 지금껏 쌓아온 삶의 경험들은 지혜이자 동시에 고정관념으로 작용한다. 이 고정관념들은 옮은 것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새로운 것들은 틀린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흔히 젊은 사람들은 경험이 적은 텅 빈 도화지와 같아서,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인다고 한다. 반면 나이든 사람들은 그림이 빼곡한 도화기와 같아서 기존 스타일과 조화를 이루는 그림들만 받아들인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들을 받아들이며, 도화지가 하나의 스타일로 채워지는 것을 막아야한다. 너무 시간이 지나버리면 돌이키려해도 돌아갈 수 없다. 본인 스스로가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나의 스타일을 가지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삶의 다양성을 잃어버리는 것도 참 아쉬운 일이다.

어쨌든 이 모임을 통해서 내가 얻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