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2일 목요일 – (왕십리, 대학 선후배, 승진)

왕십리

왕십리에서 대학 선후배와 함께 셋이 저녁을 먹었다. 약속 장소가 역사 안에 있어서 오랜만에 이마트가 있는 12번 출구로 나왔다. 예전엔 여기 참 많이 왔었는데, 예전 모습은 새로운 풍경으로 덧씌워졌다. 예전에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약이 없을 때는 밤에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자주 왔었다. 그 때 참 야식을 많이 먹었고, 지금은 그 살만 남아있다.

아내를 처음 만날 때 내 체중은 70KG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세 자리가 되었다. 같이 있으면 너무 편안해서 그랬나 매 학기마다 5kg씩 꾸준히 살이쪘다. 당시에 나는 가수다 시즌1이 유행하던 때였는데, 그 방송이 끝나고 학교로 가는 분당선에 타면 귀교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노래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던 기억이 있다. 가끔은 12번 출구 앞에 있던 크리스피 도넛 매장에서 떨이 행사를 하면 1,2박스를 사가서 학교에서 나눠먹곤했다.

나도 내 추억 어린 공간도 지금은 그곳에 없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가게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또 시간이 흘러 다른 누군가가 그 공간을 자신의 추억으로 간직하겠지.

대학 선후배

오늘 만난 두 사람은 각각 나와 위 아래로 3기수가 차이난다. 즉, 내가 1학년일 때 4학년이었던 선배와 내가 4학년일 때 1학년이었던 후배다. 내피셜로 볼 때 둘은 공통점이 좀 있는 편이다. 일단 둘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며, 외국어를 잘한다. 체력도 나보다 뛰어나다. 이렇게 쓰고보니 난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다.

선배는 퇴직 동문 중에서 기자로 직업을 전향한 내가 아는 유일한 동문이다. IT 개발자도 독특하지만, 이 분의 경우엔 전혀 생소했던 분야로 향했다 점에서 더 대단하다. 합격 후에 퇴사한 나와 다르게, 퇴사 후에 직장을 구하기 시작한 것도 참 대단하다. 나는 그럴만한 용기는 없다. 자신이 가진 신념대로 세상을 잘 살아가고 계신 것 같다. 나는 그럴만한 용기는 없다.

한 명은 현재 한창 고생하는 시즌을 보내고 있다. 경찰청 생활은 빡세기로 소문이 나있어서, 나같은 꿀쟁이들은 아예 상상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열심인 친구들이 주로 입성하기 때문에 잘 버텨내는 모양이다. 나라면 한 달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생활이다. 그래도 중요하고 큰 사건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아서 일을 배우기에는 좋다고 한다. 그 욕심의 유무가 경찰을 직업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투영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본청의 모두가 그런건 아니다. 승진이나 과시를 위해 인성과 삶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은 곳이다.

오늘의 모임은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즐거웠다. 각자의 포지션이 달라서일까. 현직인 동기들과 만나면 사실 조금씩 거리감을 느낀다. 승진과 업무에 너무 많은 관심이 몰려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동대 배치전에 가졌던 학번 모임도 그 느낌이 있어 슬퍼졌던 적이 있다. 지금은 퇴직자가 좀 있어서 그런지 그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승진

어느 직장이나 승진에 신경끄기는 쉽지 않다. 어느 직장이거나 승진을 하면 연봉이 올라가는 건 기본이고, 대게는 권력도 주어진다. 재작년을 시작으로 우리 기수도 경감 승진자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올해는 동기 대부분이 승진을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조직 내부에서 승진에 신경끄기는 정말 힘들다. ‘경위 1000명이 경감 1명을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조직은 계급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경위 이하에서는 계급의 역할은 적으며, ‘나이’에 좀 더 가중치를 둔다. 하지만 경감부터는 계급이 훨씬 큰 가중치를 갖는다. 계급이 같다면 언제 그 계급을 달았는지를 표시하는 ‘배명일자’로 순번이 돌아간다.

기수 문화가 존재하는 경찰대생에게 이런 계급 중심 사회는 큰 독이다. 승진에서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뭔가를 추구하기는 절대 쉽지 않다. 내 승진이 늦어질수록 내 후배가 상사로 올 확률은 높아진다. 졸업은 똑같은 경위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남에따라 스펙트럼이 점차 나눠진다. 친한 후배라면 계급이 역전되더라도 상관없지만, 7~8기수 차이나서 개인적으로 알 도리가 없는 후배라면 서로 어색해진다. 차라리 그 둘이 선후배 사이가 아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텐데.

나도 작년에 인터뷰에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시험 승진 도서와 마하펜 20개를 사놓았었다. 조직 내에서 높은 곳의 승진은 너무 심신이 힘든 일이라 최소한 ‘경감’만 빨리 달고 한숨 돌리려는 심산이었다. 그 책과 펜을 쓰게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 미래가 펼쳐졌더라도 나는 승진하지 못했을 것 같다.


2019. 8. 22. diary (한글) 왕십리, 대학 선후배, 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