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2일 일요일 – (코골이, 총선, 중립의 어려움)

코골이

서울에서 나름 부지런히 헬스장도 다니고, 식단도 관리를 하다가 고향에 내려와서 망가진 생활을 하다보니 살이 다시 찌기 시작했다. 살이 찌면서 코골이도 예전처럼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술을 먹거나 하면 코골이가 더 심해져서 아내가 함께 잘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예전에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이놈의 코골이는 수술을 받는다고 나아지는게 아니다. 그냥 살을 빼야한다.

조만간에 결혼식에 갈 일도 있으니 다시 다이어트에 들어가야만 한다. 살이 쪄서 그런지 일도 잘 집중이 안된다. 집에 박혀있으니 백수도 아니면서 백수처럼 게을러지고 하루가 덧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하 이러면 안되는데. 오늘부터 바로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지난 금요일에 놀아제낀 대신 오늘 하루는 일을 하면서 보내기로 결심한다.

총선

다음 주면 21대 총선이다. 20대 총선 때 나는 경찰교육원에서 직무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심리적으로는 한 7~8년은 지난 것 같은 일이 겨우 4년 전이라는게 참 신기하다. 아무래도 그 동안 대통령도 바뀌고, 내 직장도 바뀌고 결혼도 하는 등 여러 일이 생겨서 상대적으로 그 기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 많은 변화속에도 한결같은 것이 있다면 단연 정치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뽑을 사람 하나 없는 선거판. 약속이나 한듯이 서로 공수 교대를 해가며 야당은 ‘정권심판론’. 여당은 ‘내부 총질’, ‘이권 다툼’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오랫동안 이 과정을 지켜본 나로서 ‘이럴 바엔 선거가 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다.

이런 교착상태를 더욱 고착시키는 건 다름 아닌 콘크리트 지지층들이다. 우리나라가 전형적인 양당 구도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이 부패한 정치인보다 훨씬 나쁘다고 생각한다. 부패하고 나태한 이들이 계속해서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지자들 덕분에 왠만한 병신 짓이나 나쁜 짓이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떳떳하게 출마를 하고 심지어 압도적으로 당선되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당을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지지 정당이라도 표를 주지 말아야 다음 총선에는 그런 인물이 공천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현실은 당만 보고 찍어대다보니 정당 입장에서도 후보를 내는데 부담감이 훨씬 덜하고 자연히 자정 작용도 힘들어진다. 당 내에서 토론이 벌어지더라도 결과적으로 후보가 당선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뭐가 대수일까.

딱히 지지 정당이 없거나, 중도에 머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소수 정당에게 표를 줘봐야 아무 의미없겠다는 생각이든다. 비례 정당마저 거대 양당이 꼼수로 다 가져가버리는 마당에 소수 정당 지지자는 그냥 정치에 무관심한게 차라리 속이 편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콘크리트 지지자들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진다는 점이다.

지금의 상황은 두 개의 양동이에 각자 오폐수가 담겨있는 모습이다. 그 중 선거에서 승리한 하나를 햇볕에 내놓고, 다른 하나를 음지에 보관한다. 그리고 선거를 치러 결과가 바뀌면 이 배치를 서로 교대한다. 만약 한쪽만 계속해서 햇볕을 쪼이게 된다면 오폐수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썩어 악취를 풍기게된다. 계속해서 교대를 해주게 되면 그나마 썩는 속도가 느리다.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물을 가져 오지 않는 이상 소비자는 항상 덜 썩은 물을 마시는것이 최선의 선택이된다.

중립의 어려움

앞서 콘크리트 지지자들을 욕했지만 사실 나이를 먹고 정치적 입장에서 중립에 서기는 쉽지 않다. 대게 20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딱히 정치적 입장을 가질 일이 없다. 또래들 대부분이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초,중,고 교육 12년을 거치면서 집-학교 또는 학원을 반복하며 살기에 각자 차이가 있더라도 사회만큼 삶의 스펙트럼이 다양하지 못하다.

하지만 20살 사회에 내던져진 이후로 삶은 정말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크게크게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겪느냐에 따라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 결정될 확률이 매우 높다. 가령 군대에 입대해서 시위를 막으러 갔다가 시위대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고 조롱을 당한 사람은 운동권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회사에서 임금 체불이나 부당해고나 직장 갑질을 심하게 겪은 사람은 노동자의 권리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별에 따른 차별이나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피해를 겪은 사람들은 성인지 감수성을 의무 교육과정에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순전히 자기 노력만으로 자수성가를 이뤄낸 사람은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경험은 어떤식으로든 우리의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된다. 서로가 각자를 헐뜯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지지하는 입장의 경험이 나에게는 있고 너에게는 없으며, 네가 지지하는 입장의 경험이 나에게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하면서 각자를 공감능력이 없다고 비난할 수 있다. 정치적 판단은 흔히 가치판단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래서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한데’라는 물음에 우리는 서로 다른 값을 매기기 때문에 싸움은 절대로 절대로 끝날 수 없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30대가 되어오면서 내 입장은 한쪽에 대한 혐오로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시간이 지나며 또 다른 한쪽에 대한 혐오를 겪어 이도저도 아닌곳에 머무르고 있다. 스무살이 되던 시점에 나는 정치적 중립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지금 돌아보면 지극히 헛소리에 불과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삶의 경험이 편향된 이상 정치적 무관심이 아닌 중립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굳이 중립인척 애쓰려고 할 필요는 없다. 어쩌다가 삶의 모습이 바뀌게 되면 그 모습과 경험에 따라서 그 입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2020. 4. 12. diary (한글) 코골이, 총선, 중립의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