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글)

2020년 4월 10일 금요일 (P국 K대학에 대하여, 엑소더스)

P국 K대학에 대하여

세상이 참 바쁘다. 코로나, 총선 그리고 N 번 방 같이 하나만 있어도 부담스러운 이슈들이 한 번에 터질 줄이야. 모 국가 기관에서는 이런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TF(Task Force)들을 꾸려 신속하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TF. 듣기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단어. 도무지 사람을 집으로 보내주지 않는 것.

TF가 얼마나 무서운지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최근 나는 꿈을 하나 꾸었는데, 여기에서 우연히 꿈속의 나라 P국의 K대학의 졸업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K대학은 전액이 국비로 운영되는 대학으로 졸업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간부 공무원으로 임용된다고 한다. K대학의 여러 행사 중 단연 중요한 것은 졸업식으로 졸업식 시즌만 되면 학교 전체는 TF로 변한다고 한다.

K대학의 졸업식은 일반적인 대학과는 좀 다른데, 사관학교 임관식과 유사하다고 한다. 졸업식 날 모든 학생들은 제복을 차려입고 행진으로 행사장에 들어서는데, 이 연습을 무려 졸업식 한 달 전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어떤 학장은 행진 연습을 위해 학과수업을 취소시킨적도 있다고 한다. 졸업식 1주일 전부터는 외출 외박도 금지되며 주말에도 연습이 진행된다고 한다. 학생들은 풀뽑기나 미관 정비에도 동원된다고 한다. 이런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졸업식 행사에 나라의 가장 높은 지도자가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행진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동시에 가장 방치된 것이었다. 행진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 없이 지도관과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연습을 진행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방식도 기준도 없고, 줄이 뒤틀리거나 휘어지기 일쑤였는데 저학년들이 그때마다 개잡듯이 털렸다. 행진을 할 때 모든 학생들의 손발은 정확히 같은 타이밍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학생들이 행진을 할 때면 악대가 와서 북을 가지고 걸음에 박자를 넣어주었는데, 행진 대열의 길이가 꽤 길다보니 대열의 맨 앞과 뒤에 소리가 전달되는 시간이 0.5초 정도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러니 그 북소리 손과 발을 맞추면 자연히 대열 앞 뒤의 모습도 0.5초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야구장 파도타기를 보는 듯 했다.

행진의 출발 장소에서는 북소리가 없었기에 학생들의 손발은 잘 맞아 들어갔다. 그러다 행사장에 가까워져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팔다리가 꼬이기 시작한다. 행사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높으신 분들은 이걸 보고 학생들이 집중하지 않고 개판이라고 욕을 하고, 또 선배는 후배를 턴다. 많은 분노와 슬픔이 이 행진 과정에서 피어난다고 한다. 정말 안타까운 점은 졸업식 VIP인 지도자는 행진이 끝난 후에 입장하기에 이 행진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한 달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해놓고 졸업식 날 비가 쏟아져 행사가 실내 졸업식으로 바뀐적도 있다고 한다. 500명이 한 달 동안 연습한게 한 순간에 날아간 것이다. 낭비된 500달을 사람의 수명으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40년이 넘는다.

행진 외에도 학생들은 모의 졸업식을 연습한다. 모의 졸업식은 졸업식을 미리 만들어진 각본대로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다. 한 번에 40 ~ 1시간 정도 걸리는 이 모의 졸업식은 실제 졸업식 전까지 20번 넘게 실시된다고 한다. 그래서 졸업식 당일이 될쯤 학생들은 눈을 감고도 모든 순서와 대사를 읊을 수 있다고 한다. 단상 위에서는 높으신 분들이 열심히 소리를 치면서 졸업식 구성을 이리저리 바꿔대는데, 이 구성은 졸업식 전날까지도 혹은 당일 아침까지도 끊임없이 바뀐다.

이런 치열한 업데이트가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졸업식을 좀 더 VIP에게 맞추기 위함이라고 한다. ‘정의가 40대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현수막이나 ‘사회 40대악 척결’ 같은 구호를 졸업생들이 외치는 아이디어들은 이런 치열한 고민속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이 졸업식에서 학생들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아바타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행사의 이름은 졸업식이지만 VIP를 위한 P국의 국가 행사라고 보는게 맞다.

직원으로서의 행사 준비는 한층 더 괴롭다고 한다. 직원의 졸업식 준비는 2달 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는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는 내부 사정까지 보인다. 졸업식 축하 영상 하나를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다. 그 짧은 5분의 영상에는 P국 지도자의 모습, 조직 수장의 모습, K대학의 모습, 졸업생들의 다짐, 선배들의 현장 미담 사례, 정권의 슬로건, 청춘의 활기 담을 것도 참 많다.

만들어진 영상은 여러 단계의 시사회를 거친다. 여기에도 수많은 높으신 분들의 개입이 있다.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든 새기고자 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끊임없는 수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영상은 ‘최종본’, ‘최최종본’, ‘최최최종본’, ‘최종수정본’, ‘최종완성’, ‘최종완성파이널’과 같이 하루에도 수 차례나 개명을 하며 괴상한 것으로 변한다. 담당자는 외주 스튜디오직원들이 시간내에 작업물을 내놓도록 뒤에 앉아 감독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결정권자에게 검토를 받는 단계까지 간다.

길다란 탁자의 끝에는 조직의 수장이 앉아있고, 그로부터 계급 순으로 높으신 분들이 즐비하게 앉아있다. 그래도 그 탁자에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은 계급이 정말 높은 것이다. 담당자는 그 탁자 뒤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시사회가 시작된다. 1인자가 좋다고 칭찬을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누구도 입을 열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갸우뚱을 하면 담당자의 주말은 그걸로 끝이다. 1인자 밑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입을 연다. 그야말로 아무말 대 잔치다.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간다.

졸업식은 이런 ㅈ 같은 것들이 모두 끝나는 순간으로 직원과 재학생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행사다. 졸업식이 끝나면 그들은 TF도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나름 추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한다. 다시는 일상에 담고싶어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엑소더스

요즘도 가끔 나는 꿈에서 P국의 소식을 듣곤한다. 요즘 자주 들려오는 소식은 K대학 졸업생 중 공무원을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빠져나가는 비율이 점점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이 소식을 들은 P국의 많은 국민들이 분노해 인터넷에는 의무복무를 강제하거나 급기야 K대학을 폐지해야한다는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K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현실의 기준으로는 대략 7급과 6급 사이에 해당하는 공무원으로 임용된다고 한다. SKY 출신도 9급 공무원 시험을 치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자리를 버리고 나갈 수가 있을까. 우연히 나는 꿈 속에서 K대학의 졸업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꿈 속의 이야기다.

조직에서 K대 출신들은 ‘엘리트’ 집단으로 인식되며, 고위직과 요직을 상당 수 K대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비 K대 출신 입장에서는 K대 출신 위주로 조직이 굴러간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작 K대 출신 대다수는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이 창설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직 내부의 계급의 인플레이션은 점차 심각해져왔다. 어르신들의 기억에서 ‘간부’의 상징이던 계급 A는 너무 흔해져 급기야 A 계급이 실무를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실무에서 벗어나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계급인 B로 승진해야 한다. 이 승진 과정이 참 쉽지 않다. 승진은 시험과 근무 평가로 구성되는데 이 근무 평가는 누가 일을 잘했냐고 주어지기 보다는 얼마나 연차가 높은지에 따라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린 K대학 졸업생 입장에서는 동일 계급에 자신보다 연차가 높은 사람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평가에 불리하다. 그래서 승진을 원하는 이들은 근무 평가가 보장되는 대신 격무에 시달리는 자리를 자청해서 맡기도 한다. 어떤 승진 합격생은 밤에 늦게 별을 보며 퇴근해 바로 독서실로 향해 새벽까지 공부하고 퇴근하는 생활을 1년 간 했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아예 월~금을 사무실에서 보내고 출퇴근 시간을 아껴 승진 공부를 했다고 한다.

가끔은 그런 부서에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근무 평가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기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재밌는 사실은 K대학 출신을 불러서 혹사시키고 팽하는 주체가 바로 K대학 출신인 선배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이 후배들 사이에도 소문이 났는지 선배가 좋은 부서라고 말하면서 권하는 전화는 ‘보이스 피싱’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돈다고 한다. 이런 선배들이 정작 조직 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데 그도 그럴것이 비 K대 출신들 입장에서는 이런 관리자가 천사처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K대학 출신들이 승진에 매몰되는 이유는 조직 내에서 승진 외에 딱히 꿈을 펼칠 수 있는게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졸업생들 사이에서는 온갖 종류의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데, 그 중에서도 승진 소식은 귀가 없는게 아니라면 알 수밖에 없는 정보다. 후배가 승진했다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참 묘하다. 졸업한지 수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승진을 못한 선배 이야기가 들릴 때면 훗날 그게 내 이야기가 되는게 아닐까 생각이든다. 시간이 갈수록 후배들이 늘어날수록 점점 쫓기는 듯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승진의 입구는 좁은데 수많은 졸업생들이 그 곳을 통과하려고 하고 있다.

사실 K대학의 입시는 정말 어려운 편으로 입학생들 중에 P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S대나 의대를 합격한 학생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후의 인생이 썩 멋지지 않다. 앞으로 남은 자신의 인생을 시뮬레이션 해본다. 사실 승진을 한다고 인생이 윤택하고 화려해지진 않는다. 승진을 해도 공무원의 수입은 한정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노후에는 연금을 바라보고 살아야한다. 이 와중에 일찍 조직을 탈출해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수능 성적도 학교 성적도 나랑 비슷했던 동기는 억대 연봉에 잘나가는 전문직이 되었다.

다시 이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조직 밖에서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졸업생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혼자서 풀어본 대학원 시험 점수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아직까지 사회에서는 K대학 졸업생들이 희소한 편이다. 전문직 시장에서도 K대학 출신이라는게 아직까지는 메리트가 있다. 하지만 조직에 남으면,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면 그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하나 둘 조직 밖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 뒤를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엑소더스(대탈출)이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자기 선택으로 대학에 가 놓고선 왜 후회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질문의 정답은 학교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재학생들은 졸업하기 전까지 조직에 대해서 배우는게 없다. 조직과는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은 대학보다는 복무기간 4년의 군대와 더 가깝다고 한다. 4년의 교과과정과 학교생활 동안 조직의 생리나 졸업 후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눈치가 그래도 좀 있는 이들은 실습을 다녀온 후부터 나갈 채비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 나머지는 졸업과 동시에 조직에 내던져지고 그제서 각자의 방식대로 조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각자 다른 삶의 길을 걸어간다고 한다.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옳은지. 무슨 선택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답이 모두 다르다. 조직을 나간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욕을 뱉는 사람들과 조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남의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고 욕하는 일은 현실에서도 해서는 안될 일이다. 남이 어떤 인생을 살든지 자신의 행복이나 가치관을 위해 살아가면 좋은 것인데 말이다.

종합해보면 문제의 원인은 시대와 맞지 않는 시스템을 가진 K대학 그리고 졸업생을 품지 못하는 조직에 있으며 P국과 국민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고 있다. 조직을 떠나는 개인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고칠 수 있는 시스템에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적절한 보상없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운영되는 조직. 사람을 갈아넣어서 돌아가는 시스템은 지속될 수 없고 지속되어서도 안된다. 어떤 훌륭한 수장이 나타나서 조직을 바꿔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 자리는 P국의 지도자가 임명하는 자리라고 한다. 그렇다. 조직의 고위급 관리들은 모두 P국의 지도자에게 임명권이 있다. 조직 구성원들이 결정권을 가졌다면 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내가 사는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꿈 속의 이야기인데 현실처럼 고민을 해버렸다. 다행히 내가 사는 일상에서는 저런 불행한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만약 저 꿈의 내용이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한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다시 찾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2020. 4. 10. diary (한글) P국 K대학에 대하여,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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