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9일 수요일 – 수동적인 인간의 권리는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9월 예비군 시행 예정

9월부터 기존 동원/동미참 예비군 훈련이 코로나 상황으로 4시간의 집합 교육으로 대체 된다고 한다. 최소 수십 만 명이 영향을 받는 이 시행 계획에 대해 분노한 누군가가 국민청원을 작성으니 고작 3만 명 수준의 동의를 받았다. 2030 남성들이 정치적으로 고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소한의 자기 권리도 찾아먹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의 부재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준감옥과 같이 주거/이동의 자유와 강제 의무하에서 최저시급 미만의 보상을 받는것에 문제의식을 가져야한다. 과거에는 나라가 가난했기에 그 희생이 필요했다지만 이미 선진국이 된지도 한참이 지난 현재에도 그런 희생이 강제될 이유가 없다.

그나마 특혜로 주어지던 군가산점은 폐지되었고, 최근에는 통신비 지원도 아닌 고작 핸드폰 허용을 대단한 선심인 것처럼 광고했다. 전역 후에는 정기적으로 예비군에 끌려가 겨우 교통비가 될만한 보상을 받고, 사회에서는 엎어버렸을 개밥같은 식사를 먹는다. 이 말도 안되는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노예근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가장 큰 적은 꼰대다

웃기게도 이런 희생을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현 세대보다 더욱 열악한 군생활을 경험한 윗세대들이다. 마치 자기가 겪었던 부조리를 너도 반드시 겪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듯이 그들은 이 강제적인 의무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군생활때도 부조리를 그대로 답습해서 아랫세대를 착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군상들이다.

‘나는 이미 다녀왔다’, ‘나는 이미 민방위다’라는 말도 언제까지나 우스갯소리일 수 없다. 결국 이 말들에 깔린 전제는 ‘나는 이미 할 고생을 했으니 너도 뺑이를 쳐라’라는 것이다. 노예가 새로운 노예의 사슬을 목에 거는 짓을 하고 있으니 이런 노예제도가 영구적으로 동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2030 남자들은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별을 떠나서 자신들이 속한 세대의 문제에도 가만히 있는다. 정치인의 입시 비리, 취업 청탁, 부정 수급, 성착취 문제가 발생해도 아무짓을 하지 않는다. 겨우 하는 짓은 온라인에서 글을 쓰는게 전부다. 계속해서 독서실을 다니고 스터디를 하고, 착실히 저금을 한다. 그렇게살면 최소한 자기 자신은 구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마치 서서히 끓는 냄비의 개구리와 같이 자신의 몫을 빼앗기면서도 그들은 분노할 줄을 모른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블라인드 채용, 파이를 자르는 방식만 바꾼 주제에 대단한 사회 정의를 이룩한 것인양하는 제도들은 공정의 기준 자체를 없애버렸다. 정작 싸움은 새로운 기준에 의해 피해를 보는 사람과 이득을 본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다.

앞으로 정말 특별한 일이 없는 한에는 인구가 줄어드는 현 추세에서 우리가 미래 경쟁에서 뒤쳐질 것은 매우 자명하다. 자녀를 계획한다고 할 때 그 자녀가 살아갈 미래가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야한다. 현재로서 우리나라는 정말 살기 좋은 나라지만 향후 10년, 20년을 생각해보면 결국 떠나야하는 임계점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다른 나라들의 사정들도 고려해봐야한다. 좋고 나쁨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니까.

여하튼 지금의 상황은 모두 2030 세대가 자초한 결과임에 분명하다. 정치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불이익에도 가만히 있는 사람을 신경쓸 정치가가 어디에 있겠나. 아무쪼록 2030 세대는 자신의 능력으로 생활이 힘든 것은 정권이나 국회의원 탓이 아니라 체제에 순응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2020. 7. 29. diary (한글) 수동적인 인간의 권리는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