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트루스 –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트루스 (Post Truth)

포스트트루스 (Post Truth)의 정의는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으로 국내에서는 ‘탈진실’로 불린다고 한다. ‘탈진실’이라는 키워드는 나에게 생소하다. ‘가짜뉴스’와 같은 말들은 좀 더 이해하기 쉽다. 이 책은 진실과 다른 것들이 ‘대안적 진실’로 불리면서 진실을 덮어버리는 혼란스러운 현재를 지적한다. 국내도서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례는 미국에서 가져온 것들이며, 트럼프를 주된 예시의 대상으로 삼는다. 책을 읽는 동안 나로서는 이 책 또한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저자의 주장또한 의도적으로 선별되고 누락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이 책에서 진영논리를 좀 벗길 수 있다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없이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인간의 한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이다. 정치적으로 너무 열성적인 나머지 한쪽 극단에 치우친 이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갸우뚱할 ‘가짜뉴스’를 믿거나,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을 시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확증편향은 서로 상반된 주장에 대해 서로 다른 감정을 일으키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지하는 주장에 대해 ‘믿고 싶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지지하지 않는 주장에 대해 ‘틀렸다’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그 자체로 자연적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도도 하지 않을 일이다.

비용의 증가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이 ‘영양가는 있지만, 맛대가리 없는 반찬’을 먹는 일이라고 생각해보자. ‘가짜뉴스’는 ‘실제로 영양가는 없지만, 영양가가 있다고 주장하는 맛 좋은 반찬’과 같다. ‘가짜뉴스’의 범람은 ‘진실’이라는 반찬이 ‘가짜뉴스’에 덮여버린 것과 같다. 우선 ‘진실’을 찾는것부터 어렵게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꼭 그런 반찬을 먹을 필요있나, 각자 자기한테 잘 맞는 반찬을 먹으면 되는거지’라는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말도 그럴싸하다. 안그래도 ‘진실’을 찾기 힘든 상황에서, 내가 믿고 싶은 것들이 딱 그 모양도 몸에 좋은 것처럼 꾸며져서 나온다면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언론사에 따라 대표하는 정치적 방향이나, 정당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들었던 조언은 고작 가능한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야한다는 것 뿐이다. 이 말은 정말 무책임하지만, 사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2개의 진영이 각자 편파적으로 보도를 진행한다고 하면, 그 둘의 합집합으로 독자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여기에 ‘가짜뉴스’가 들어간다면 어떨까. 명백한 거짓말이라면 구분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보도나 시리즈가 몽땅 거짓이거나, 몽땅 진실로 구분되지 않는다.

여기서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라’는 말은 폐기처분된다. 하나 쓸데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수십개의 언론사가 존재하며, 유투브나 SNS를 통한 개인 언론까지 포함해서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는 상황이 여기에 더해진다. 이미 모든 이들의 주장을 다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지쳐버린다. 이것이 비단 하나의 사실이 아닌, 여러가지 사실이라고 생각해보라. 진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저 바닥에 놓여있을 뿐이다.

가짜뉴스에 대한 처벌

‘가짜뉴스’는 매우 가성비가 좋은 공격수단이다. 자극적인 의혹이 퍼지는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빠르다. 일단 의혹이 퍼지고나면, 의혹을 최초로 퍼뜨린 사람이 나타나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그것을 믿지 않을지 모른다. ‘아님 말고’식의 보도는 이런 면에서 기댓값이 항상 이득으로 향하는 시도다. 약간의 진실을 배합해서 만들어내는 가짜뉴스는 박멸하기 힘든 바이러스와 같다. ‘팩트체크’ 또한 큰 효용을 기대할 수 없다. 그 보도가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오로지 그 지지자들만 그 말을 믿기 때문이다. ‘팩트체크’란 이름만 달리했지, 일반 보도와 다를게 없다.

‘가짜뉴스’를 박멸하는 일은 쉽지 않다. 국내 웹사이트가 아닌 해외 플랫폼에서 생산하는 ‘가짜뉴스’는 차단하기 쉽지 않다. 국내법으로 처벌한다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벌금에 그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로 인해 얻는 정치적, 금전적 이득은 훨씬 크다. 정권 조차도 어느 정도 ‘가짜뉴스’의 이득을 보고 있다면 ‘가짜뉴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진실을 선택해야하는 혼돈에서 살게 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은 이 혼돈을 더욱 현실로 만든다. 어떤 정치인의 스캔들 영상이 찍혔다고 가정해보자. 이 정치인이 자신은 해당 시간에 다른 곳에 있었으며, 해당 영상은 반대파에 의해 위조되었다 말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그런 조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더 이상 영상이나 녹음이 진실을 알리는 수단이 될 수 없을 수 있다. 이런 혼돈은 결국 누구에게 이득을 주겠는가? 정치인일 뿐이다. 저자가 계속해서 제시한 지구온난화 사례처럼, 거의 명백한 것 앞에서도 대중은 갈라서서 결국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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