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6일 목요일 – 공으로 과를 덮을 수 없다
서울시장 미투 사건
올 한 해는 꿈이라고 생각할만큼 충격적이고 뜨거운 이슈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해다. 미투와 관련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시장을 두고,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또 다시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정치성향에 따라 이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현상이 신기하면서도 앞으로 이런 분열이 더 심해질 것 같다고 생각하니 암담하다.
죄의 유뮤에 관한 주장
싸움의 쟁점들은 첫째로 그 죄에 관해, 한쪽에서는 수사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단순히 고소 사실만으로 고소 내용을 사실로 단정짓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주장을 앞세운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르자면 맞는 말이다.
죄가 없다면 떳떳하게 수사를 받고 결백을 입증하면 되는데 자살을 한 것 자체가 무죄를 입증할 수 없으니 그런것이 아니냐. 피고인의 사망으로 공소권이 없으니 수사 결과를 밝힐 수도 없는게 아니냐는 주장. 이것 또한 맞는 말이다.
과거의 선행이 현재의 잘못을 덮을 수 있는가
고인이 오랫동안 시민운동에 헌신하며 미친 영향이 크고 주변인들도 그는 평소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착했으며, 변호사로서의 이력 또한 그것을 뒷밤침 하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으로 그의 인생 전체를 매도하면 안되며, 이미 고인이 되었는데 심한 비난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평소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며 이미지를 만들어 정치적인 이득을 얻었고, 그 신분 또한 일반인도 아닌 서울시장이라는 매우 중요한 직위에 있으면서도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그런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매우 나쁘고, 심지어 피해자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죽은 것이 어떻게 감싸줄 수 있느냐는 주장이 있다.
공과 사는 각자 존재한다
그 외에도 많은 논쟁들이 있지만 굳이 다루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다. 내 의견은 간단하다. 어떤 잘한 일로 인해서 잘못을 상계할 수 없다는 것. 어떤 초인이 불에 타서 쓰러지기 직전의 100층 건물 옥상에서 100명의 사람을 구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부딪힌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하자. 이 사람이 감옥에 가야하느냐에 대해 논란은 거의 없을 것이라 본다.
어떤 인물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 ‘그래서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라는 결론을 만들고 싶은 욕심은 버려야한다. 인간은 모든 상황에서 일관되게 행동하며 세월이 흘러도 그 성격이 절대 변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과거의 자신과 쉐도우 복싱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진실을 알면서도 앞선 질문을 어떻게든 답변하려고 쓸데없는 노력들을 한다.
단순히 잘못은 무엇이고 잘한 점은 무엇인지 구분하면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나의 인식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나쁜 행동’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머릿 속은 단순하게 만들어주겠지만 누군가에게 그걸 설명하려고 할 때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한 이유들과 궤변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누군가는 죽일 놈에서 착한 놈이 되고, 누군가는 착한 놈에서 죽일 놈이 된다.
우리는 누군가는 착한 사람, 나의 편으로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배척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어한다. 차라리 모든 사람들을 아예 나쁜 사람의 편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 좀 더 안전할지 모른다. 최소한 잘못에 대해 오판이 나오는 일은 없다. 지지 진영이 없는 사람의 말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세상은 이성이 아닌 감성이 지배한다. 이성은 그 감정을 어떻게 조종할지 고민할때만 쓸모가 있다.
2020. 7. 16. diary (한글) 공으로 과를 덮을 수 없다